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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 작전의 신으로 불린 메이지 최고의 군략가



메이지시대 일본군부 구성을 보면 육군은 쬬슈번 해군은 사쯔마번이라고들 한다. 사쯔마번이 육군에서 우위를 놓치고 대신 해군에서 우위를 점한 결정적인 이유는 세이난 전쟁에서 사쯔마의 사이고타카모리가 패해 조적(朝敵)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내 견제와 균형에 따라 쬬슈번이 장악한 육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쯔마인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야마이와오(大山巌)와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다. 

오야마이와오도 탁월한 군인이었지만 일본 메이지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인은 군제를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의 참모본부로 개편하고 정보개념을 도입해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카와카미소로쿠다. 

 

 



보불전쟁 직후 독일유학을 하면서 몰트케를 연구한 그는 군의장교였던 모리오가이로 하여금 몰트케의 배경이 되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장교들에게 강의하도록 한다. 또 일로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후쿠시마야스마사로 하여금 러시아 시베리아를 단기 횡단하며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기도 했다. 

또 공산주의 혁명가 레닌과 폴란드의 반 제정러시아 세력을 지원해 짜르체제가 내부에서 분열하도록 첩보활동을 펼친 아카시모토지로(明石元二郎)도 카와카미소로쿠의 작품이다. 

일로전쟁에 앞서 카와카미 소로쿠는 청나라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예측하고 첩보전을 준비했다. 조선의 인천과 중국 전역에 걸친 방대한 정보망을 구축했다. 

1873년에는 北村重頼, 別府晋介를 조선에 파견하고, 池上四郎, 武市熊吉는 만주에 파견했다. 1874년에는 樺山資紀, 児玉利国, 福島九成를 청나라 남부에 보내고 이듬해에는 鳥弘毅, 瀬兼正등 초급 장교들을 유학명목으로 베이징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한다. 청불전쟁에 즈음해서는 육군소위 小沢豁郎를 푸저우에 보내 중국의 비밀결사조직인 꺼라오후이(哥老会)와 봉기를 계획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일청전쟁에 대비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청나라 어느 곳을 상륙지점으로 하고 병력수송방법과 상륙 후 전략목표를 어디로 할지를 미리 계획하기 위해 지형까지 파악했다.  
 
베이징의 공사관을 거점으로 포병대위인 柴五郎, 공병대위 青木宣純, 石川潔太등으로 하여금 베이징에서 산해관 그리고 그 이북까지 정탐하도록 했다. 200여km에 이르는 여정으로 이들은 기밀을 위해 필기구는 소지하지 않고 모든 것은 암기하도록 명령받았다. 소지품은 담배와 인단, 정명수(精銘水) 반창고(絆創膏)같은 일본의약품들을 소지하고 촌락에 머물면서 중국인들에게 이를 팔거나 주기도 했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카와카미는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유능한 장교들을 이처럼 중국각지에 정보수집 목적으로 파견했는데 정보장교 가운데 발군은 아라오세이(荒尾精)였다. 아라오세이는 낭인의 거두인 토야마 미쯔루가 5백년에 한번 나오는 사나이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중국어를 구사했던 아라오세이는 저술가, 종군기자, 사전편찬자로 유명하며 중국진출 1세대 사업가인 상하이 楽善堂의 점주 키시다깅고(岸田吟香)의 협조로 중국 한커우에  楽善堂支店을 내 왕성한 첩보활동을 벌였다. 

아로오세이는 한커우를 첩보수집 전진기지로 宗方小太郎、井手三郎등과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몽고, 만주 윈난등 곳곳의 인심, 풍토, 상공업, 교통 등을 조사했다.

메이징 22년 아라오세이는 한커우에서 3년 동안의 첩보활동을 마치고 귀국해 참모본부에 2만6천자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중국에 日清貿易商会를 설립하고 부속기관으로 日清貿易研究所를 만들자는 안을 참모차장인 카와카미 소로쿠에게 설명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중국에 관한 아라오세이의 지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中原正に鹿を逐ふ、惟に高材疾足の者之を獲る>다. 사기의 회음후열전(史记·淮阴侯列传)에 나오는 “秦失其鹿;天下共逐之;高材疾足者先登焉.(진나라가 멸망해 사슴<천하패권>을 잃었으니 모두가 그것을 쫓는다. 실력있고 발빠른자가 먼저 차지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청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러 서구열강이 모두 다투어 분할하고 있으니 일본도 실력있고 발빠른 주자(高材疾足こうざい-しっそく)가 돼야 한다는 호소였다.  

결론적으로貿易商会는 무산되고 대신 日清貿易研究所설립안은 받아들여졌다. 첩보의 필요성을 역설한 카와카미 참모차장 덕분이었다. 4만엔의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야마가카아리토모(山原有朋)총리와 재무장관인 마쯔카타마사요시(松方正義), 육군차관 카쯔라타로(桂太郎)등 여러대신들이 도왔지만 카와카미는 집을 저당 잡아 자금을 마련해 보탰을 정도로 가장 적극적이었다.  

연구소설립안이 통과됨에 따라 1890년 아라오세이는 일본전국에서 모인 150명의 학생과 함께 요코하마를 출발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나중에 연구소학생의 졸업식에는 중국여행중이던 카미카와소로쿠가 수행원과 함께 참석해 이들에게 호소했다. 

“일청전쟁이 임박했다. 이번 전쟁은 스스로 부강하다고 자처하는 청국을 적으로 하는 한판 승부다. 제군들은 적의 軍情과 기타 內情을 파악해 나라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일청전쟁이 있기 전 청나라 자희태후(서태후)가 군함건조에 쓸 자금을 빼돌려 이화원을 짓고 매끼 100여 가지의 요리를 즐기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동안 일본은 정반대였다. 메이지천황은 황실지출의 10분의 1을 해군건설에 쓰겠다고 밝히자 각료들과 관리들도 봉급의 4분의 1을 갹출했다. 또 공무원들은 천황에 따라 월급의 10분의 1일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하루에 20전을 버는 막노동자가 절반을 떼서 군함건조비용에 보태라고 내놓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청전쟁에서의 승리는 카와카미소로쿠가 독일의 최신 군사전략을 응용하고 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에 따라 정보의 개념을 도입해 청조의 정세를 심도 있게 파악했을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카와카미소로쿠는 사쓰마번 출신이지만 고르게 인재를 발탁해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문무양도(文武兩道)를 확실히 구분해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평생 무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카쯔라타로(桂太郎)、코다마겐타로(児玉源太郎)와 함께 메이지육군의 산바가라스(三羽烏특정분야에 뛰어난 3명, 증권용어로 흑삼병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이라 불린다.  

카와카미소로쿠는 일로전쟁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때 그의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했던 이는 라이벌인 쬬슈출신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그는 “천하의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스미다가와의 물과 카미카와만큼은 내 마음대로 안됐다”면서 천하의 인재를 잃었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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