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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아라오세이(荒尾精), 그리고 메이지 사업보국의 모델 키시다긴코(岸田吟香)



일본 메이지 시대 중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파이의 최고봉은 아라오세이(荒尾精)라는 사람이다.  1910년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전기가 출판될 정보였는데 제목이 거인 아라오세이(巨人荒尾精)였고 당대의 일본인들은 그를 가리켜 흥아대책의 중추적 인물(兴亚大策之中枢人物)내지 동양지사 가운데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까지 부를 정도였다. 대륙의 일본 낭인조직으로 유명한 고쿠류카이(黑龙会)의 동아선각지사열전(东亚先觉志士列传)의 기록에따르면 유명한 군국주의자인 토야마 미쯔루(头山满とうやま みつる)는 심지어 그를 5백년에 한번 나는 위인이며 사이고다카모리 이후 인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라오세이는 나고야번사집안 출신으로 유신시절인 메이지유신초기 폐번치현으로 가족이 도쿄로 이주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16살 되던해 사쯔마 번사출신으로 도쿄에서 경찰관을 하던 菅井 誠美(すがい まさみ)라는 이가 그를 거둬 학교를 보냈다. 사쯔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 전쟁에서 패한 뒤 제국군 내부에서는 숙청이 벌어졌고 사쯔마 번 출신이 많았던 해군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청일 전쟁에서 해군이 육군보다 전공세우기에 급급했던 이유다. 사쯔마 번사출신이 스폰서였던 아라오세이는 가고시마출신 군인들의 해군확장의지, 그리고 대륙침략구상에 매료됐다.

 

 

2020/10/21 - [분류 전체보기] -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 작전의 신으로 불린 메이지 최고의 군략가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 작전의 신으로 불린 메이지 최고의 군략가

메이지시대 일본군부 구성을 보면 육군은 쬬슈번 해군은 사쯔마번이라고들 한다. 사쯔마번이 육군에서 우위를 놓치고 대신 해군에서 우위를 점한 결정적인 이유는 세이난 전쟁

kikigame.tistory.com

 



세이난 전쟁이 끝나자 20살이 된 아라오세이는 군에 들어가 육사를 졸업한다. 그러나 그는 군에서 경력을 꾸준히 쌓아 장성으로 출세하는 길을 버리고 중국전문가가 되기 위해 군문을 떠나 중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흥아(兴亚), 즉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大山 巌(おおやま いわお)는 그를 면담하고는 다들 구미지역으로 유학을 가려하는데 왜 하필 중국 같은 비루한 곳으로 가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아라오세이는 “중국을 취하고 난 뒤 어진 정치를 베풀어 아시아권을 부흥시키고자 한다.”고 당돌하게 답변했다. 

 



일본육군은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가 군문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고 대신 쿠마모토로 갈 것을 발령한다. 그는 쿠마모토에서 2년동안 근무하면서 중국에서 유학한 이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어를 학습한다.

이후 일본육군은 그를 참모본부 중국과로 발령한다. 그가 원했던 대로 중국관련 기밀문건과 지도를 접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일본군은 인재를 알아보고 중시했다. 육군참모차장 川上操六(かわかみ そうろく)는 아라오세이와 나이차가 15살이나 있었지만 고급장성들과 회의를 할 때 그에게 수행을 지시하고 의견을 구하기도 하는 등 아라오세이를 극진히 아꼈다. 상관과 부하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져 아라오세이가 상하이에 스파이학교인 日清貿易研究所(にっしんぼうえきけんきゅうしょ)를 세우자 가와가미 소로쿠는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가예산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쏟고 부인과 함께 자택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모은 돈을 쾌척한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면서 아라오세이는 기밀문건을 다루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서구 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이 하나가 돼야 한다면서 침략을 정당화한 ‘대동아 공영권’의 기초적 구상을 담은 宇内统一论, 과 兴亚策‘을 써서 관심을 받게 된다. 

참모본부에서 열심히 근무한 아라오세이는 1886년 가와가미소로쿠가 보살펴준 덕분에 중위로 진급하고 꿈에 그리던 중국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파견된다. 상하이에서 그는 메이지 시대의 사업보국모델인 키시다 긴코(岸田吟香)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키시다 긴코는 일본의 1세대 기업가다. 메이지 시대 걸출한 인물들이 그렇듯 기업가라고만 특정하기에는 다방면에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17살 때 한학을 공부한 그는 미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일영사전(和英辞典)을 출간했고 그로부터 안약(眼药水)비방을 터득했다. 일찍이 도쿄일일신문의 주간을 했을 정도로 필력도 뛰어났고 일본군을 따라 타이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나중에 도쿄 긴자에 라쿠젠도(乐善堂)라는 약국을 차리고 서적도 판매했다. 라쿠젠도에서 예전에 터득한 안약비방으로 ‘세이키스이’라는 안약을 출시해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사업이 성공하자 1828년 상하이에 라쿠젠도 분점을 내고 안약을 판매하는 한편 인쇄소도 열어 제자백가 문고판을 출판해 상당한 돈을 벌게 된다. 

 


상하이에서 수십년 간 머문 그는 현지에서 약품을 매개로 중국의 인텔리계층과도 교분을 나눠 명사로 떠오르는데  이 때 그의 사교활동은 춘추전국시대 식객을 대접했던 것으로 유명한 맹상군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아라오세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전후해 그가 운영하던 라쿠젠도는 본격적인 일본의 대중국 스파이 거점으로 변신하게 된다. 특히 아라오세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한커우에 라쿠젠도 분점을 개설하게 하는데 이는 화중지역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된다. 키시다 긴코는 만년에 지나지지(支那地志)를 편찬해 일본의 중국침략을 위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아라오세이와 키시다 긴코는 일본총참모부의 지시에 따라 대륙에 떠돌던 여러계파의 낭인들을 규합해 정리하는 한편 라쿠젠도와 본격적인 스파이 양성기구인 日清貿易研究所(にっしんぼうえきけんきゅうしょ)을 중심으로 대량의 중국관련 정보를 생산해 일본에 보낸다. 이 때 책으로 출판한 것이 청국통상총람(清国通商总览)인데 무려 2300페이지 분량이다.



아라오세이는 1896년 일본이 식민지로 점령한 타이완에서 페스트로 사망하게 되는데 대동아공영권이론의 토대를 제공한 그의 저작물들은 지금도 일본 학계의 연구대상이다. 또 중위계급의 스파이 아라오세이가 일본의 맹상군으로 불리는 키시다 긴코와 만나 첩보망을 중국전역에 확장한 것도 전설적인 스토리로 회자되고 있다.